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자의 눈] '이슬람 왕국' 터키의 기독교인들

터키는 지금 21세기형 이슬람 국가를 꿈꾼다. 현대적 체제와 종교의 양립은 터키의 야심이다. 아직 이슬람권에서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정착한 사례는 없다. 대신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 중동이 맞닿은 지정학상의 이점을 안고 있다. 이는 두 이념이 공존하기에 적합한 배경이 된다. 문명과 역사의 교차로 터키를 다녀왔다. 터키는 현재 공존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이슬람권의 맹주를 노린다. 패권을 쥐려는 낌새는 취재 내내 감지됐다. 터키는 국가발전 프로젝트(2023 비전)를 시행하고 있다. 건국 100주년(2023년)까지 세계 10대 경제국, 유럽연합 가입, 세계 5대 관광국 진입 등의 목표를 내걸었다. 최신 브랜드 광고와 미묘한 아잔 소리가 도시 한복판에서 자연스레 엉기는 이유다. 종교는 터키를 견인하는 힘이다. 터번을 벗고 시대에 맞게 세련된 이슬람으로 탈바꿈 중이다. 전세계 학자들을 모아 이슬람의 글로벌화를 시도하는 '하디스 프로젝트', 젊은층을 위한 신이슬람 지성주의 운동, 터키인 디아스포라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모스크 설립 프로젝트를 주도한다. 이스탄불 내 '예니 자미(yeni camii)'라는 이슬람 사원에서 그들의 속내를 엿보았다. '예니 자미'는 '새로운 모스크(new mosque)'란 뜻이다. 이름에는 의미가 실린다. 무슬림에게 모스크는 단순히 신을 위한 기도처가 아니다. 정체성을 담은 표상이다. 모스크는 방향이다. 그들은 정착지, 이동지마다 반드시 사원을 세운다. 잠식 또는 개척의 의도다. 유럽 내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건 그들의 정신이 스며들고 있다는 방증이다. 터키는 얼마 전 문호를 개방한 쿠바에 모스크 건설을 제안했다. 최근 한국 이태원 이슬람 사원의 재건축까지 도맡은 건 지향하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반면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도 기독교가 존재한다. 비율로는 0.0075%(약 6000명)의 극소수다. 취재 중 현지 한인 선교사들을 여럿 만났다. 이슬람의 신념 체계가 깊이 뿌리 내린 터키에서 선교 활동은 어렵다. 터키는 대외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정서는 타종교를 배척한다. 주민증엔 신념(종교)이 표시되고, 경찰은 종교 활동을 감시한다. 선교사들은 "아직 씨앗을 뿌리고 땅을 일구는 과정"으로 빗댔다. 하지만 "외부에선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결과)를 요구한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한국 기독교의 선교 성과주의, 현장에 대한 인식 부재, 맹목성 등도 꼬집었다. '형제의 나라' 또는 한류에만 국한된 시각이 터키의 현실을 가린 걸까. 기독교는 단순한 잣대로 이슬람을 재서는 안 된다. 무슬림에게 종교는 역사이자 민족의 정신이다. 그들이 타종교를 수용한다는 건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터키 땅엔 동서고금의 오랜 시간이 녹아있다. 그들의 꿈은 총체적이다. 실현을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종교를 비롯한 정치, 사회, 역사 등 총 4차례에 걸쳐 터키를 심층보도했다. 현실을 다각도로 보기 위해서다. 현재는 역사에서 태생했고, 오늘은 어제의 실존 아닌가. 미래는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2015-05-17

무슬림의 땅, 한인이 되살리는 기독교 정신

안디옥 지역은 초대교회 요람 그리스도인 명칭 처음 붙은 곳 현재 무슬림과 난민으로 넘쳐 안디옥개신교회 기독교 정신 무슬림 전도 및 난민 구호 사역 미주 한인교회도 함께 참여해 이슬람 정서가 팽배한 터키에는 종교에 대한 배척이 존재한다. 정서적 영역 안에서 타종교, 특히 기독교가 똬리를 틀기 힘든 곳이다. 그럼에도, 터키는 아직 기독교의 흔적을 품고 있다. 역사의 꺼풀을 벗겨내면 기독교가 꽃 폈던 시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수의 교회들은 기독교의 온기를 유지하는 힘이다. 지난달 19~28일까지 터키 곳곳을 다니며 그 온기를 취재수첩에 담았다. 이슬람의 아잔 소리 속에서 기독교는 작은 꽃을 오롯이 피워내고 있었다. 글·사진=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지난달 24일 오후 3시. 터키 하타이 주 공항에 도착했다. 이스탄불에서 남동쪽으로 700마일 떨어진 이곳은 시리아 최접경 지역이다. IS(이슬람국가)의 학살과 시리아 내전을 피해 터키 국경을 넘는 난민이 급증하면서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 곳이다. 분위기는 스산하다.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정치적으로 차가운 하타이에도 온기는 있다. 초대교회의 요람이자 사도 바울의 발길이 닿았던 안디옥(현재 명칭 안타키아)이 기독교의 숨결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서다. 안타키아는 하타이의 주도다. 택시를 타고 남쪽으로 20마일쯤 가면 안타키아에 이른다. 하타이 주청사 옆으로 유일하게 십자가가 내걸린 건물 하나가 보인다. 터키에선 너무나 생소한 십자가다. 교회 입구엔 '안디옥개신교회'라는 이름이 한글로 굵게 새겨져 있다. 터키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한국 광림교회가 세운(2000년 6월) 교회다. 이슬람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 '안디옥'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디옥개신교회는 현재 이슬람에 가려진 기독교 복음의 정신을 되살리고 있다. 터키 끝자락에서 기독교 한류가 불고 있는 셈이다. 취재에 동행했던 국제터키네트워크 김성간 목사는 "터키 전역에는 단 3명의 외국인만이 정식으로 종교 비자를 발급 받아 활동중"이라며 "안디옥개신교회 장성호 목사(2007년 광림교회 파송)가 그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교회 입구엔 신변 안전을 위해 묵직한 철문이 세워져 있다. 안디옥개신교회 장성호 목사는 "안디옥은 시리아 난민촌이 최초로 생겨난 곳이며 IS 등 테러 그룹 활동 지역과 가장 근접한 곳"이라며 "터키인을 비롯한 시리아 난민 등 세례를 받은 50여명의 기독교인이 매주 이곳에 모여 터키어와 아랍어로 예배를 드린다"고 말했다. 사역은 다양하다. 평일에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성경과 함께 기본적인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음식이나 옷가지를 나눠주기도 한다. 무슬림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 교회에서 세례식도 거행한다. 안디옥개신교회는 최근 난민 구호 사역도 시작했다. 수년전 부터 시리아 난민이 급증해서다. 난민 사역은 미주 한인교회가 함께 한다. 토런스 지역 주님세운교회(담임목사 박성규)는 올해초 난민 사역을 돕기 위해 안디옥개신교회를 비롯한 각 난민촌에 12만 달러를 지원했다. 또 산호세뉴비전교회도 매해 단기선교팀을 파송중이다. 안디옥개신교회는 지원을 통해 각종 구호 물품을 구입, 하타이 곳곳의 난민촌을 방문하고 있다. <본지 4월27일자 A-1면> 관련기사 보기 "오스만의 영광을…" 이슬람 맹주로 내달리다…21세기형 이슬람 국가 터키를 가다 (상) 장 목사는 "난민들은 내전과 IS의 학살을 눈으로 보며 죽음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접했기 때문에 육적, 정신적, 영적으로 너무나 피폐해진 상태"라며 "그들에게 도움 뿐 아니라 기독교 복음을 함께 전하는 것을 구호 사역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의 안타키아는 어제의 안디옥과 흡사하다. 2000년전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가장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예수를 전했다. 당시 기독교인은 핍박과 박해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명칭이 맨 처음 붙은 지역도 안디옥(사도행전 11장26절)이다. 안타까운 현실에도 기독교의 숨결은 스민다. 그 온기는 슬픈 미래를 지운다. 1년에 딱 한번<4월23일>, 기독교와 이슬람 교류 무슬림들 부육아다 섬으로 몰려 기도 받으면 소원 이뤄진다 믿어 기독교인은 소통과 전도의 기회로 이날은 터키 경찰도 제재 안 해 1년에 딱 하루, 터키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류가 정식으로 허용되는 날(4월23일)이 있다. 지난달 23일 오전 7시. 부육아다 섬으로 향했다. 이스탄불에서 배를 타고 1시간쯤 걸리는 곳이다. 선착장 입구는 이미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히잡을 쓴 무슬림과 성경을 손에 든 크리스천이 함께 배에서 함께 내리는 특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날은 터키의 공휴일(어린이날)이다. 해가 질 때까지 섬을 찾는 무슬림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의 발걸음은 ‘미신’을 좇아 한 곳을 향한다. 미주 지역 터키 선교 단체인 실크웨이브미션 이세웅 총무는 “섬 꼭대기에는 1901년에 그리스 정교회가 세운 ‘세이트조지’라는 작은 교회가 있다”며 “그곳에서 기도를 받으면 병이 낫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매해 ‘4월23일’이 되면 수만 명의 무슬림이 섬으로 몰려든다”고 말했다. 이날 무슬림들은 타인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반긴다. 터키 경찰도 종교 활동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이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마음을 나누는 기회다. 접촉의 허용은 자연스레 선교가 된다. 터키개신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터키 현지 교인들은 전도를 위해 매년 400~500명씩 이곳을 방문한다. 지난해부터는 선교 단체인 실크웨이브미션을 중심으로 미주 한인 교회들도 동참했다. 터키 카라코이인터네셔널처치 스테판 수 선교사(미국)는 “10여 명의 교인과 함께 성경과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무슬림에게 기도를 해주려고 나왔다”며 “이날 만큼은 무슬림이 타종교인에게 기도 받는 것을 좋아하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음을 열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기독교가 무슬림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유일한 날”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을 따라 섬 꼭대기에 있는 교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정상까지는 30분 정도 가야한다. 언덕 초입에는 무슬림에게 실타래와 각설탕을 파는 수십 명의 상인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구입한 실타래를 조심스레 풀면서 언덕을 오르는 무슬림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각설탕을 나눠주며 교회로 향하는 이들로 북적인다. 무슬림 훌랴 타스키란(45)씨는 “좋은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 때문에 섬을 찾았다. 실타래를 풀면서 길을 오르는 건 목적지까지 실이 끊어지지 않을 경우 소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며 “각설탕은 아무런 문제없이 달콤한 인생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눠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길가에는 기독교인들이 기타를 치고 찬양을 부르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슬림에게 성경을 나눠주며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는 모습도 보였다. 미국 선교 단체인 FIT인터네셔널 커트 에드워드 선교사는 “이날은 평소 기독교에 대한 의문이나 오해를 가진 무슬림들이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기도 한다”며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올해는 미주 지역에서 산호세뉴비전교회, 버지니아열린문장로교회. 베델한인교회, 세리토스동양선교교회 단기선교팀 등 90여 명의 한인이 참여했다. 에르칸 코흐(52)씨는 “이렇게 먼곳까지 와서 우리를(무슬림) 위해 기도해주는 기독교인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실크웨이브미션 관계자들과 한인 교인들은 이날 특별히 터키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간이무대를 설치하고 합창 공연, 가야금 및 대금 연주 등을 하며 전도활동을 펼쳤다. 베델한인교회 서동민 장로는 “이슬람 지역에서 기독교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감격인지 모르겠다”며 “하루종일 무슬림을 만나며 기도를 해주다 보니 과거 이 땅에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떠올라 벅찼다”고 말했다. 장열 기자

2015-05-11

"오스만의 영광을…" 이슬람 맹주로 내달리다

이슬람 벗겨내면 기독교 흔적 사도 바울 고향, 초대교회 요람 헌법엔 종교 자유 및 활동 보장 국교 없지만 국민 98%가 무슬림 사회 정서는 타종교 용납 안해 이슬람 세계화 프로젝트 주도 인간과 종교는 늘 맞물린다. 동서고금을 품은 땅 터키엔 종교의 흔적이 선명하다. 과거는 성서의 배경이었다. 지금은 이슬람의 무대다. 끊임없는 문명의 교차가 남긴 자취다. 오랜 역사의 침전이 두 종교의 지층을 형성했다. 지난달 19~28일까지 터키를 방문했다. 이스탄불에서 안타키아(성경 명칭·안디옥)까지 역사의 온기가 밴 땅을 직접 밟으며 종교의 공존과 상충이 뿜어내는 미묘한 색을 취재수첩에 고스란히 담았다. 본지는 종교 특집으로 터키의 종교적 상황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 글·사진=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두 종교의 숨결 터키는 공식 국교가 없다. 그럼에도, 하루 다섯 번 아잔 소리가 온 도시를 울린다. 전체 인구(8000만 명)의 98%가 무슬림이다. 터키 내 개신교인은 6000여 명에 불과하다. 0.0075%의 극소수인 셈이다. 실크웨이브미션 이세웅 총무는 "인구대비로 보면 전세계에서 기독교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터키"라고 말했다. 대신 표면이 다는 아니다. 이슬람의 역사를 벗기면 기독교가 드러난다. 역사와 시대가 두 꽃의 공존을 허락지 않았을 뿐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에 있는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보면 두 종교의 숨결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원래 가톨릭 성당(동로마 537년)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이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면서 1453년부터는 이슬람 사원(모스크)로 바뀌었다. 이슬람 교도들이 아야소피아 벽면에 모자이크로 그려진 예수 그림에 회칠을 한 흔적은 종교의 변천을 보여준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터키는 본래 개신교에 있어 초대교회의 요람이었다. 복음이 로마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산파 역할을 했던 곳이다. 사도 바울의 고향(타르수스)과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땅이다. 터키는 개신교, 가톨릭, 이슬람 등이 오랜 역사속에서 종교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세속 국가로 시작한 터키 현대의 터키(1923년 건국)는 원래 이슬람과 분리를 추구했다. 초대 대통령이자 '터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1881~1938)는 국가의 세속화를 주창했다. 터키의 근대화를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강력한 지침이었던 코란의 율법보다 현대적인 헌법 체계를 터키에 심었다. 이슬람력 대신 태양력을 도입했고, 터번 착용을 폐지했다. 무슬림의 안식일(금요일)을 없애고, 다른 국가와 같이 일요일을 공식 휴일로 지정했다. 그는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했다. '이슬람이 국교'라는 헌법 조항을 삭제(1928년)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뿌리 내린 민족 종교의 DNA(이슬람)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중심에는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있다. 모스크는 곧 무슬림의 정체성이다. 터키종교청에 따르면 터키 내 공식 모스크는 7만5000개다. 국제터키네트워크(ITN) 김성간 목사는 "터키는 어딜 가나 모스크가 있다"며 "무슬림은 그들의 정체성을 되새기고 이슬람의 영향력을 확장해나가는 방편으로 정착지나 이동지에 반드시 모스크를 세운다"고 전했다. 겉과 속 다른 터키 터키는 헌법을 통해 종교의 자유와 모든 종류의 종교 행사 등을 보장한다. 하지만 대외적인 것과 실상은 다르다. 종교와 관련해 터키 헌법과 사회 정서는 괴리가 크다. 즉,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사회 정서는 이슬람을 제외한 타종교를 용납하지 않는다. 터키에서 사역중인 김 드보라 선교사는 "터키에서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가족으로부터 쫓겨나기도 한다"며 "이런 두려움 때문에 무슬림들은 기독교를 접하는 걸 두려워하고 설령 개신교로 개종을 해도 대외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는 걸 회피한다"고 말했다. 터키 주민증에는 종교를 의무적으로 기재하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 'Islam(이슬람)'으로 명시돼 있다. 하지만, 차별 문제가 대두되자 지난 2006년부터 종교란을 비워둘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다. 김 드보라 선교사는 "법이 개정됐지만 주민증에 아무 종교도 명시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핍박과 차별은 마찬가지"라며 "최근에는 종교기재란을 아예 없애는 법까지 통과가 됐지만 시행은 안 되고 있다"고 전했다. 다시 이슬람 중심으로 세속국가를 추구하던 터키가 다시 이슬람 중심주의로 방향을 급선회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현재 터키 대통령(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과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은 지난 2002년부터 '신이슬람 환원주의'를 내세워 국가의 힘을 새롭게 결집하고 있다. 이세웅 총무는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재건하기 위해 이슬람 정신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터키는 '21세기형 이슬람 국가'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세속 국가라는 바탕 아래 이슬람도 현대적 체제 속에 얼마든지 녹아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터키는 유럽, 아시아, 중동 등이 맞물린 지정학상의 이점을 살려 건국 100주년(2023년)까지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세계 10대 경제국, 유럽연합 가입, 세계 5대 관광국 진입 등을 내걸었다. 이는 이슬람권의 맹주가 되어 유럽까지 영향력을 뻗겠다는 터키의 심산이다. 이슬람의 세계화를 노리는 터키는 크게 모스크(문화), 언어(학문), 결혼이라는 세 가지 전략을 시행한다. 전세계 이슬람 학자들이 참여해 이슬람의 세계화를 시도하는 '하디스 프로젝트', 젊은층을 위한 신이슬람지성주의운동, 포교를 위한 결혼 정책, 세계 각국에 이슬람 학교 및 유치원 세우기 등을 진두지휘한다. 무엇보다 터키인 디아스포라는 이슬람 세계화를 이루는 가장 큰 자산이다. 현재 유럽, 아프리카, 북미 등에 살고 있는 터키인 디아스포라는 총 550만 명이다. 터키는 이들의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 모스크 설립 프로젝트를 시행한다. 이슬람권에서 한국은 동아시아의 주요 전략 지역이다. 한국이슬람교중앙서원 통계에 따르면 이미 10만 여명의 외국인 무슬림이 한국에 살고 있다. 또 개종한 한국인 무슬림도 3만5000명에 이른다. 터키에서 사역중인 김바나바 선교사는 "최근 터키가 한국 이태원의 모스크를 오스만 제국 스타일로 화려하게 지어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며 "유럽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이 커지고, 젊은층 사이에서 무슬림이 급증하고 있는 데는 터키의 역할이 크다"고 전했다. 터키 개신교, 0.0075%의 분전 소수지만 약진 거듭 중 은둔 활동에서 밖으로 터키 내 개신교 활동은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비록 개신교인은 0.0075%(6000명)의 소수지만 곳곳에서 가정교회 등을 통해 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지 선교단체에 따르면 터키 내 활동중인 선교사는 1950명으로 그 중 450명이 한인이다. 무려 23%가 한인 선교사인 셈이다. 교회는 총 135개가 있다. 개신교인은 6000명이다. 터키 A선교사는 “터키 같은 나라에서 개신교인이 6000명인 것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터키는 총 81개 주로 구성돼 있다. 33개 주에 소수의 가정교회와 성도, 선교사가 있다. 반면 48개 주에는 기독교 공동체나 정기적인 예배가 하나도 없다. 터키어 성경은 1941년 완성됐다.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등 대도시에는 호프, 쉐마 등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도 운영중이다. 사회 정서상 은둔적이던 터키 개신교인들이 목숨을 내걸고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있었다. 지난 2007년 4월18일 말라티아 지역에서 독일인 선교사(틸만)와 터키인 사역자(네자티, 우르 형제) 세 명이 무슬림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수천 명의 개신교인들이 “나도 죽이라”며 피켓을 들고 길거리로 나온 사건은 터키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ITN 김성간 목사는 “그 사건으로 인해 터키 개신교인들이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됐다”며 “터키개신교교회협의회는 이후 매년 4월18일을 ‘터키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장열 기자

2015-05-04

목숨 걸고 국경 넘은 사람들 '터키 난민촌', 슬픔·긴장·배고픔의 생지옥. 아이들 미소도 지워버렸다

24일 오후 3시 터키 하타이 공항에 도착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남동쪽으로 약 700마일 떨어진 곳이다. 시리아와 맞닿은 최접경 지역이다. 이곳엔 목숨을 걸고 터키 국경을 넘은 30만 명의 난민이 있다. IS(이슬람국가)의 공격과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었기 때문이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하타이주 크르칸 지역의 난민들을 찾았다. 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40여 분쯤 달렸다. 시리아 국경에서 1km 남짓한 곳까지 들어갔다. 자동차가 멈춰 서자 수십 명의 아이들이 두 손을 내밀며 주변을 에워싼다. 차에서 내리며 한 소년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주머니에 있던 사탕 하나를 쥐어 줬다. 그래도 계속 손을 내민다. 굶주림에 대한 무언의 표현이다. 25일 하타이 주 크르칸 지역의 한 난민촌. 파란 비닐 포대로 만든 텐트 10여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가까이서 보니 텐트라기보다 낡은 천막에 가깝다. 이곳엔 총 18가구가 살고 있다. 땅을 파서 임시로 만든 화장실 1개를 100여 명이 나눠 쓴다. 주변은 온통 누런 흙바닥과 잔돌뿐이다. 대부분의 아이는 맨발이다. 얼마나 긴 시간을 신발 없이 다녔을까. 네댓 살쯤 보이는 한 아이의 시커먼 발을 만져봤다. 발바닥엔 굳은살이 배겨있다. 이곳에서 4년째 생활하는 살라 하딘(45)씨가 천막 뒤로 가깝게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그는 "저 산맥을 경계로 시리아와 터키가 나뉜다. 여기서 1킬로미터 정도만 걸어가면 시리아 지역"이라고 했다. 살라 하딘 씨는 "고향은 내전 때문에 폐허가 됐다. 우리 가족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옷가지만 들고 무작정 60킬로미터(약 37마일)를 걸어 국경을 넘었다"며 "그리운 고향 땅으로 너무나 가고 싶지만 위험해서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안내를 맡은 장성호 선교사(안디옥개신교회)는 "하타이는 시리아 최접경 지역으로서 터키에서 가장 먼저 난민촌이 형성(2011년 3월)된 곳"이라고 했다. 장 선교사는 "최근엔 IS(이슬람국가)의 공격으로 더 많은 난민이 터키로 몰려들고 있다. 지난 겨울 저 산을 넘다가 얼어 죽은 사람도 많다"며 "현재 하타이 주에만 약 30만 명의 난민이 있는데 대부분 이렇게 천막촌을 이루고 살아간다"고 덧붙였다. 하타이는 봄기운이 완연한 4월임에도 한밤 중 날씨는 섭씨 5~7도(화씨 41~44도)까지 내려간다.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흙 바닥은 비닐 포대로 덮여 있다. 그 위로 얇은 담요 한두 장이 깔려 있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깐 누워봤다. 등이 결릴 정도로 울퉁불퉁한 바닥이 그대로 느껴진다. 부엌과 거주 공간의 구분은 없다. 천막 한편에 서너 개의 냄비와 컵 찌꺼기가 묻은 접시 등이 전부다. 세 아이의 엄마인 아메드 씨는 "보통 구호품 또는 밭일을 해서 얻은 하루 품삯(10리라.약 4달러)으로 식량을 얻는다"며 "천막 앞에 나무를 모아 불을 때고 거기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물론 모든 난민촌이 이처럼 열악한 건 아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비껴가는 곳도 있다. 난민촌 거주 환경은 곧 시리아 내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 현재 하타이 내에서 터키 정부와 UN이 공식 운영하는 난민 캠프는 3곳(총 1만5000명 수용)이다. 주로 시리아 군인 가족들과 사회 지도층이 머문다. 그곳은 보안을 위해 언론은 물론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차단된다.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난민이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다 보니 실상은 암울하다. 현지 안내인 게오르그씨는 "난민 아이들은 대개 10살만 넘으면 밖에 나가서 하루종일 노동을 한다. 어떤 부모는 돈을 받고 딸을 조혼까지 시킨다"며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건 난민 여성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매춘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생존 본능이 극한의 하루를 살게 한다. 다수의 난민이 도움의 사각지대에서 연명하고 있다. 슬픔과 긴장의 응고는 아이들의 미소까지 지워버렸다. 하타이=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 터키 내 시리아 난민 현황-IS 공격 심화로 탈출 급증…155만명 방치 시리아 접경인 하타이를 비롯한 디야르바키르, 가지안테프, 아다나 등 터키 남동부 지역의 공식 난민 캠프는 전부 22곳(총 25만 명)에 불과하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이 발표한 최근 통계(2014년 말 기준)에 따르면 터키 내 시리아 난민은 180만 명이다. 공식 난민 캠프를 제외하면 약 155만 명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지난해 9월 터키 정부가 국경을 일시 개방하자 이틀 만에 6만 명이 넘는 난민이 순식간에 몰리기도 했다. 난민이 급증하면서 통제가 어려워지자 현재 터키 정부는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 지역을 모두 차단한 상태다. 하지만 시리아 내전과 맞물려 IS의 공격이 심해지면서 국경을 몰래 넘는 난민이 점점 늘고 있다. 주요 월경 루트는 산이다. 현재 NGO 단체, 터키개신교연합회, 한인 선교사들이 난민들을 돕고 있다. 미주에서는 토런스 지역 주님세운교회, 새너제이 지역 뉴비전교회가 지원하고 있지만 도움의 손길은 턱없이 부족하다. 터키 남동부 지역은 치안마저 불안하다. 현재 한국 정부는 시리아 접경인 하타이 지역에 적색경보(철수권고·국경 10km 내)를 발령했다. 미국 정부 역시 하타이를 '위험 지역'으로 지정했다. 장성호 선교사는 "하타이는 성경의 '안디옥' 지역이기 때문에 과거엔 성지순례객이 많았지만 시리아 내전 이후 관광객의 발걸음도 끊겼다"며 "최근엔 하타이 지역 병원에서 IS 대원들이 몰래 치료를 받은 적도 있고, 외국인 납치 등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야간에는 외출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OCHA는 시리아 내전과 IS의 공격 때문에 터키를 비롯한 인근 주변국으로 유입된 난민을 총 1100만 명(2014년 12월 기준)으로 보고 있다. 이 중 돌봄이 필요한 어린이가 560만 명, 접근 불가 지역에 거주하는 난민을 48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도움문의:(310) 482-0574 장열 기자

2015-04-26

과거와 현대의 공존, 이슬람 맹주 노린다

곳곳 초대 대통령 우상화 아르메니안 학살 부정 여전 야심찬 국가발전 계획 추진 그러나 도심엔 난민들 북적 터키 이스탄불엔 4월인데도 해가 지면 입김이 진하게 나올 정도로 춥습니다. 이슬람국가(IS)의 학살과 시리아 내전을 피해 터키 국경을 넘은 수십만 명의 난민이 있습니다. 그들을 참상을 취재하러 시리아 최접경 지역인 하타이 난민촌으로 떠나려 합니다. 이스탄불의 모습을 우선 전합니다. 동서고금은 이스탄불에서 응축됐다. 유럽과 아시아가 맞닿았다. 실크로드의 끝점이 찍혔던 곳이다. 거기서 문명이 교차했고, 시대가 연결됐다. 교류는 생기를 돌게 한다. 활력은 지금도 여전하다. 20일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경적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입구는 번잡하다. 온통 노란 택시와 사람들이 넘친다. 한 공항 직원이 "이곳은 국제선 여객만 연간 4000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 공항"이라고 귀띔했다. 이스탄불은 지정학상 공존과 상충이 절묘하게 엉겨있다. 현대적 색채 속에 도시를 울리는 아잔 소리가 미묘함을 덧칠한다. 가장 먼저 터키의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1881~1938)를 마주했다. 어딜 가나 그의 초상화가 반긴다. 그는 터키의 지주다. 이스탄불의 첫 관문(공항)도 그의 성으로 명칭 했다. 성씨(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는 국회가 부여(1934년)했다. 달러를 '리라'로 환전했다. 모든 지폐엔 그의 얼굴이 새겨있다. 아타튀르크에 대한 추앙은 종교적 신념에 버금간다. 구르칸 허네빅(자영업)씨는 "우리에게 그는 최고의 지도자였다. 아타튀르크를 모욕하는 행위는 법으로도 금지돼 있다"고 했다. 그는 정치를 종교(이슬람)와 분리했다. 세속주의를 주창했다. 서양 교육을 도입했고, 여성 해방을 허락했다. 터키(1923년)는 그의 근대적 개혁으로 세워졌다. 24일(금)은 터키가 불편한 날이다.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기'다. 터키의 전신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인 강제 추방을 시행(1915년 4월24일)하면서 당시 150만 명이 질병, 기아, 집단 사살로 희생됐다. 일부 유럽국가는 이 비극을 '제노사이드(학살)'로 규정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지난 12일 "20세기 첫 인종학살"이라고 표현했다. 터키는 매번 그러한 역사적 관점을 거부 또는 반발한다. 구시가지(술탄아흐멧)로 향했다. 블루모스크, 아야소피아 등 문화 유산이 즐비한 곳이다. 길거리에 1차 세계대전 중 터키의 '갈리폴리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문구가 눈에 띈다. 아르메니아가 '학살 100주기' 행사를 개최하는 날, 터키는 '갈리폴리 전투 100주년'을 기념키로 했다. 가판대에서 신문 한 부를 집어 들었다. 터키는 총선(6월7일)을 앞두고 있다. 거리는 선거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다. 터키는 지금 '국가 발전 프로젝트(2023 비전)'를 시행중이다. 건국 100주년(2023년)까지 세계 10대 경제국, 유럽연합 가입, 세계 5대 관광국 진입을 내걸었다. 실크웨이브미션(터키선교단체) 이세웅 총무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슬람 중심주의'를 내세워 터키의 힘을 다시 결집하고 이슬람권의 맹주 국가가 되기 위해 초석을 다져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발걸음은 해질녘 '예니 자미(yeni camii)'란 모스크 앞에 멈췄다. 예니 자미는 '새로운 모스크(new mosque)'란 뜻이다. 모스크는 무슬림의 정신이다. 그들은 정착지마다 사원을 세우며 정체성을 확장해 나간다. 터키는 얼마전 문호를 개방한 쿠바에 모스크 건설을 제안했다. 힘의 과시다. 최근 한국 이태원 이슬람 사원의 재건축까지 도맡았다. 터키는 세속주의를 벗고 다시 이슬람으로 회귀중이다. 터키는 시대적 난제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다리는 이스탄불의 어제(구시가지)와 오늘(신시가지)를 가른다. 21일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에 위치한 탁심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스탄불에서 외침과 저항의 상징적 장소다. 탁심 광장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여러 차례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터키 내 좌우 대립의 충돌, 노동절 시위, 정부군의 발포 등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곳이다. 피가 서린 탁심 광장은 지금 현대적 분위기가 묻어난다. 과거의 아픔은 유명 브랜드 광고와 네온사인이 가득한 탁심의 번화가(이스티그랄 거리)에 가린 듯하다. 화려해도 그림자는 있다. 외진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보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돈을 달라며 손짓한다. 주머니 속에 있던 10리라를 꺼내 한 여성에게 갔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손으로 배를 만진다. 계속 굶주린 것 같다. 호텔 직원 시야르 케피르씨는 "그들에게 돈을 주지는 마라. 대개 난민들"이라며 "터키 경찰은 난민을 적발하면 난민 캠프 등으로 다시 돌려보낸다"고 말했다. 터키내 난민 문제는 심각하다. 현재 시리아 난민 180만 명, 쿠르드 난민 20만 명이 터키로 들어왔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 통계에 따르면 터키 남동부 지역에 설치된 캠프(22곳)의 수용인원은 25만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난민촌 주변에 그대로 방치된다. 일부는 일자리를 찾아 도심 지역으로 올라오지만 적응은 어렵다. 무사 알악산(식당 웨이터) 씨는 "터키 실업률이 9%를 넘는 상황에서 저렴한 노동력의 난민이 유입되자 터키의 근로 임금까지 낮아지고 있다"며 "범죄나 절도 등 사회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난민은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터키 내에선 쿠르드인 문제도 심각하다. 현재 쿠르드 인은 터키 인구(8000만 명)의 약 20%다. 그들은 소수지만 정당도 있다. 표심을 무시할 수 없다. 터키 내에서 쿠르드 언어 사용이 합법화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터키의 겉과 속은 괴리가 크다. 대외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정서는 이슬람을 제외한 타종교를 용납하지 않는다. 주민증엔 신념(종교)이 표시된다. 경찰은 종교 활동을 감시한다. 언론의 자유는 허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반정부 성향의 언론인을 모두 체포했다. 이러한 내부 사정은 유럽연합(EU) 가입을 갈망하는 터키가 반드시 넘어야 할 문제들이다. 그렇다 보니 터키의 난민 수용 정책은 국제사회 가운데 일종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몸짓도 내포돼 있다. 현재 최대 난민 수용국으로 지난해만 40억 달러를 난민 정책에 투입했다. 난민촌은 터키 남동부 지역에 주로 형성됐다. 그곳엔 난민들이 시리아 내전과 IS의 학살을 피해 국경을 넘고 있다. 시리아 최접경 지역 하타이로 향하기로 했다. 그곳엔 슬픈 현실이 기다린다. jang.yeol@koreadaily.com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15-04-24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